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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녀(忠節女) 논개(論介)

 

지금으로부터 4백여 년 전. 밤 여덟(時)시경 주진사(朱進士)내외는 저녁밥을 먹고 내일에의 살림꾸리기와 가정을 어떻게 이끌어 가야 할지 등을 다정하게 의논하고 있었다.

 

남편 주진사는 배가 남산만큼 부풀어 만삭이 된 부인을 바라보며, “여보, 해산달이 언제요?”하고 정중하게 묻자 부인은 수줍어하는 모습을 지으면서,“서방님, 별걸 다 물으세요. 그런 일은 우리 같은 아낙네가 관여할 일이지 서방님 같은 선비께서는 모른 체 하시는 거예요.”하며 부인의 이 말이 막 끝나자마자. “아이구 ! 배야, 왜 이렇게 배가 아프지?”하며 진통이 시작되는 듯 부인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졌다.

 

부인은 무적지근한 아랫배를 자신의 손으로 쓰다듬으며 혹시나 해서 소피를 보았지만 그래도 양쪽 방광이 쏟아지는 듯 무겁고 진통은 더욱 심해갔다. 이상하다 싶어 배를 자세히 쳐다보았더니 뱃속에서 태아가 노는 냥 뱃가죽이 움직였다.

 

그때야 부인은 해산을 하게 될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어 방으로 들어가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다. 곁에 있던 주진사는 부인이 해산할 기미를 보이자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방안에 혼자 남은 부인의 신음소리를 내며 문고리를 잡고 안간힘을 주는 모습이 불빛 그림자로 비추어 나타났다.

 

부인이 그렇게 몸부림을 치자 밖에 있던 주진사는 어쩔 줄 모르고 발만 동동 구리고 있는데 갑자기, “응애∼응애∼”하는 힘찬 아기 울음소리가 유난스럽게도 카랑카랑하게 울려 퍼졌다.

 

주진사는 아기 울음소리가 힘찬 것으로 보아‘사내아이구나’하는 생각을 하였으나 실은 바로 저 유명한 논개(論介)가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논개가 태어난 해는 갑술년(甲戌年)으로, 음력9월이라서 달의 상징인 간지도 갑술(甲戌)이고 그 날이 마침 9월 9일이었으므로 낳은 날짜의 간지도 갑술이며, 낳은 시간이 밤 여덟시 종반이라 역시 갑술이 되는, 그러니까 논개의 사주팔자가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 등으로 갑자(甲字)넷과 술자(戌字)넷으로만 구성된 것이다.

 

이를 주역팔괘로 작괘를 해 보면 진위뢰(震爲雷)괘로 엄청나게 강한 팔자였다. 이렇게 회귀한 사주팔자를 지니고 태어난 논개가 부모의 사랑을 흠뻑 받으며 자라 어언 열세 살의 나이가 되었을 때, 공교롭게도 부친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가 버리자 두 모녀는 당장 끼니 이을 걱정에 할 수 없이 작은아버지(숙부)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워낙 논개의 미색이 뛰어나고, 언행이 단정하여 많은 사람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재물에 남다르게 욕심이 많은 작은아버지는 논개를 이웃마을 부잣집 며느리로 내줘버렸다. 논개의 신랑은 사람노릇을 도저히 할 수 없는 백치(白癡)병신이었다.

 

기가 막힌 논개는 이왕에 시집을 온 이상 마음을 굳게 먹고 잘 살아보려고 노력했지만 날마다 발작을 하는 신랑 병세를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는 참담한 상황이었다. 고통에 견디다 못한 논개는 울며불며 맨발로 외가에 피신해가기에 이르렀다. 급기야는 신랑집의 고발로 포졸들에게 잡혀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장수 현감에 의해서 문초를 받기 시작한 논개는 모든 것을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뒤늦게 야 논개 작은아버지의 간계(奸計)에 빠져들었음을 알게 된 현감 최경회(崔慶會)는 정상을 참작하여 논개에게는 무죄를 내리고, 대신 딸을 고생시킨 명목으로 논개 어머니에게 2년의 관청에서 종살이를 하라는 일종의 관비형(官婢形)을 내렸다.

 

갈 곳이 없게 된 논개는 현감 최경회의 보살핌으로 그의 집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친 부녀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던 두 사람에게 큰 변화가 일고 있었다. 그것은 논개 나이 열아홉 살이 될 무렵 공교롭게도 최경회의 부인이 몸져눕고 얼마지 않아 그만 병사하고 말았다.

 

주위정세가 이렇게 되자 논개는 최경회의 후실이 돼 그런 대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한 여자로써 행복하게 살아가던 논개에게 엄청난 충격의 비보가 날아들었다.

 

임진왜란의 국난이 있자 최경회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 兵馬節度使)로 임전케 됐는데 그만 진주성싸움에서 장렬한 전사를 하고 말았다.

 

남편의 전사비보를 받은 논개는 그 자리에서 비장한 각오를 했다.

‘남의 나라를 침략한 왜놈들 두고봐라! 이 소첩이 서방님의 원수를 갚고 말 것이다.’라고 분노를 하며 복수의 날을 기다렸다.

 

때마침 칠월칠석(七月七夕)을 맞은 왜장들은 촉석루(矗石樓)에서 승전을 기념하는 대연회를 베풀고 흥청망청 놀고 있었다.

 

논개는 많은 조선 기생들이 왜장들 사이에서 춤과 노래로 그들을 즐겁게 하는 틈을 타 기생으로 변복을 하고 노래와 가야금 반주로 왜장들의 가슴을 들뜨게 하기 시작했다. 절세 미인에다 노래와 가야금 솜씨가 뛰어난 논개는 왜장들끼리도 서로 질투하는 대상이 되었다. 논개는 이미 죽기로 결심해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었다.

 

논개의 자태에 몸이 달은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毛谷村文助]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논개에서 춤을 요청했다. 논개는 마음 속으로, ‘이놈, 너는 오늘이 제삿날이다. 타향 이국만리 와서 죽는 게 불쌍하기도 하나 서방님의 원수를 갚고 나라에 충성을 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응했다.

 

논개는 금방이라도 왜장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싶은 복받치는 감정을 억누르고 왜장을 촉석루 난간으로 점점 유인했다.

 

수백 척이나 되는 촉석루 절벽 아래는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서운 파도가 출렁이는데, 논개에게 완전히 넋이 빠진 왜장은 한 치라도 더 논개를 자신의 품안으로 끌어당기려 추태를 부렸다.

 

논개는“서방님, 왜 그러시나이까? 제가 이렇게 껴안아 드리면 되질 않습니까?” 하면서 있는 힘을 다 하여 왜장을 껴안고는 재빠르게 왜장을 난간 쪽으로 위치를 바꾸어 복수의 괴력을 다해 밀어 부쳤다.

 

처음에는 왜장이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이미 그것은 최후의 발악으로 발버둥치는 몸짓일 뿐이었다. 그리고 미리 논개는 계획적으로 열 손가락 마디마다 반지를 끼고 이러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술에 취한 왜장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논개는 왜장을 껴안은 채 물 속으로 뛰어들어 한 많은 일생을 마치게 되었던 것이다.

 

훗날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뛰어내렸던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불렀으며, 사당(祠堂)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1846년(헌종 12) 당시의 현감 정주석(鄭胄錫)이 장수군 장수면(長水面) 장수리에 논개가 자라난 고장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를 건립하였다.

 

그가 비문을 짓고 그의 아들이 글씨를 썼다. 1956년‘논개사당(論介祠堂)’을 건립할 때 땅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현 위치에 옮겨놓았다.

비문에는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라고 씌어 있다. 장수군에서는 매년 9월 9일에 논개를 추모하기 위해 논개제전(論介祭典)을 열고 있다.

이 날은 장수군에서 논개 아가씨를 선발하고 기념탑을 참배하는 등 논개의 정신을 되새기는 각종 민속행사를 가진다.

 

[註] 기록에 따라 논개가 의기였다는 설과 또는 남편의 복수를 위하여 기생으로 변복했다는 설이 있는데, 어느 것이 진설인지는 차제하고 여기서는 다만 논개의 행적만을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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